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이 아침에] 눈먼 탕자의 길

가을 나무는 슬프고 찬란하다. 한여름 불타는 태양 속에 불에 댄 것처럼 사랑을 하고 가을에는 그 사랑을 미련 없이 등 떠밀어 보낸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빛과 색깔이 있을까. 가을은 신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렌지색과 빨강을 녹색의 팔레트에 풀고 하늘에 보라색 물감을 눈물방울로 떨어트린다.     곧이어 겨울이 도착하리라. 잎이 떠난 앙상한 가지들은 옛시인의 노래를 읊조리며 모진 계절을 견뎌낼 것이다. 나무들은 뿌리 깊숙이 한 점 숨겨 둔 옛사랑을 간직하며 공허한 세월을 추스른다. 새날은 기다리는 자에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수레바퀴로 팔랑개비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만이’더는 쪼개지지 않는 형태로 ‘존재하며 과거는 현재에 대한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에 대한 기대로 존재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새긴다. 사는 게 춥고 힘들어도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기다리며 인고하는 자에게는 소망의 빛으로 다가온다.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항금시대에 부와 명예로 유명세를 떨친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그림은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제라드 드 레이싱의 찬사처럼 렘브란트는 붓, 분필, 에칭용 조각칼을 사용하여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렘브란트(1606-1669) 작품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 눈은 초점이 흐려 있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멀게 된 것일까.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 장님이 된 걸까. 사랑은 눈이 멀기까지 누구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다. 아버지의 왼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 손이고 오른쪽은 매끈한 여자 손이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통해 화해와 용서, 치유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들의 샌들 한쪽은 망가지고 거의 벗겨져 있다. 왼발은 상처투성이다.     아버지 품을 떠나 얼마나 지독한 가난에 찌들었는지, 죄수같이 삭발한 머리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강을 건넌 뒤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돌아온 탕자’와 다름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렘브란트는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났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신분상승의 허영심과 자신의 ‘명성’에 도취해 저택을 구입하는 등 낭비벽이 심해지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태어난 자녀들이 연이어 죽는 불행이 연속되고 결국 파산해 빈민촌으로 쫓겨난 렘브란트는 6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에서 빛과 어둠을 통해’우리는 탕자의 길을 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Havenly(천국 같은)’로 전시회 제목을 정했다. 화랑 경영하며 30년 동안 남의 작품 파느라 그림을 못 그렸다. 돈독이 오르면 예술혼이 죽는다. 천국 가는 길이 있다면, 그 길섶에서 눈이 멀도록 불태워 사랑할 수 있다면, 불멸의 아름다움 담아 작별 인사하는 대평원의 나무들처럼, 탕자의 눈동자 속에서 우주는  찬란하게 빛날 것이므로.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탕자 마술사 렘브란트 가을 나무 어머니 생각

2022-11-27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먼 탕자의 길

가을 나무는 슬프고 찬란하다. 한여름 불타는 태양 속에 불에 댄 것처럼 사랑을 하고 가을에는 그 사랑을 미련 없이 등 떠밀어 보낸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빛과 색깔이 있을까. 가을은 신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렌지색과 빨강을 녹색의 팔레트에 풀고 하늘에 보라색 물감을 눈물 방울로 떨어트린다.   곧이어 겨울이 도착하리라. 잎이 떠난 앙상한 가지들은 옛시인의 노래를 읊조리며 모진 계절을 견뎌낼 것이다. 나무들은 뿌리 깊숙이 한 점 숨겨 둔 옛사랑을 간직하며 공허한 세월을 추스린다. 새 날은 기다리는 자에게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수레바퀴로 팔랑개비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현재만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형태로’ 존재 하며 과거는 현재에 대한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에 대한 기대로 존재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을 새긴다. 사는 게 춥고 힘들어도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니라 기다리며 인고하는 자에게는 소망의 빛으로 다가온다.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는 17세기 네델란드의 항금시대에 부와 명예로 유명세를 떨친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그림은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제라드 드 레이싱의 찬사처럼 렘브란트는 붓, 분필, 에칭용 조각칼을 사용하여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렘브란트(1606-1669) 작품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1669)를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 눈은 초점이 흐려 있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올 그 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이 짓물러 멀게 된 것일까.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 장님이 된 걸까. 사랑은 눈이 멀기까지 누구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다. 아버지의 왼손은 힘줄이 두드러진 남자 손이고 오른쪽은 매끈한 여자 손이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통해 화해와 용서, 치유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들의 샌들 한 쪽은 망가지고 거의 벗겨져 있다. 왼발은 상처 투성이다.   아버지 품을 떠나 얼마나 지독한 가난에 찌들었는지, 죄수같이 삭발한 머리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죽음의 강을 건넌 뒤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돌아온 탕자’와 다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렘브란트는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신분상승의 허영심과 자신의 ‘명성’에 도취해 대저택을 구입하고 낭비벽에 심화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태어난 아이들이 연이어 죽는 불행이 연속되고 결국 파산해 빈민촌으로 쫒겨나고 렘브란트는 6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에서 빛과 어둠을 통해 ‘우리는 탕자의 길을 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Havenly(천국 같은)’로 전시회 제목을 정했다. 화랑 경영하며 30년동안 남의 작품 파느라 그림을 못 그렸다. 돈 독이 오르면 예술혼이 죽는다. 천국 가는 길이 있다면, 그 길섶에서 눈이 멀도록 불태워 사랑할 수 있다면, 불멸의 아름다움 담아 작별 인사하는 대평원의 나무들처럼, 탕자의 눈동자 속에서 우주는 찬란하게 빛날 것이므로.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탕자 마술사 렘브란트 가을 나무 방앗간집 아들

2022-11-22

[살며 생각하며] 늦가을의 단상

입동 초입의 새벽 한기가 오스스 옷깃을 파고든다. 숲속에서 스 멀 스 멀  피어오르는 옅은 안개가 숲길을 점령해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온몸을 휘감는다. 미명 속에서 몽환적인 기분으로 조심조심 적요의 산책로를 홀로 걷는다.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낙엽들의 울림이 온몸으로 전해져 늦가을을 전율하게 한다. 이런 호젓한 시간에 홀로 산책을 하는 것이 얼마 만인가. 참으로 값지고 소중한 축복의 시간이다.      나는 늦가을을 사랑한다. 지난여름 탕자처럼 쏘다니며 질탕하게 삶을 연주했던 나무들이 잎새들을 다 떨구고 빈 손 들고 하늘의 품에 안긴 늦가을을 나는 더 없이 사랑한다. 늦가을은 그 풍요하고 왁자지껄하던 여름의 기차에서 나만이 덩그렇게 낯선 역사(驛舍)에 남겨놓고 모두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만 같은 허전함과 삭막함이 마른 바람으로 살갗을 스치는 계절이다.    이 황량한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조차 따습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이미 노년의 나이이기 때문일까. 돌아온 탕자의 모습처럼 아무 것도 걸친 것 없이 맨손 들고 서있는 나무들이 가슴에 포근히 안겨온다. 위험한 계곡에서 서성이며 물결 따라 춤추며 야음을 타고 유혹의 속삭임도 던졌던 젊은 날의 푸르른 잎새들도 하나 둘 물살에 떠내려 보내고, 그 분망했던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온 나목들은 이제사 겸손히 자기 자리에 서있다. 하늘을 향해 빈손을 높이 들어 자비를 구하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나목들의 마음을 나는 느낀다.    이제는 떠나가는 것들에 미련도 두지 말자. 떠날 때 떠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을. 떠남을 애달파 내 또한 그 얼마만한 세월을 아픈 자국 남기며 살아왔던가. 떠날 때 미련 없이 떠날 줄 아는 것도, 떠날 때 서슴없이 떠나보낼 줄 아는 것도 또한 깊고 큰 사랑인 것을. 내 철없고 어리석음은 언제나 떠날 때 떠나야 할 줄도 몰라 허둥대며, 떠날 사람 서슴없이 떠나보내지 못하여 연연해하며 살아왔던 부질없음이여!   가을 나무의 잎새를 보라. 정처없이 흔들리면서도 한줌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제 한 몸을 기꺼이 불태우는 소망의 잎새. 언제부터인가 나는 열매보다 나뭇잎을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이지 가을날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기까지는 그야말로 수많은 나뭇잎의 헌신적인 봉사가 있었지 않았는가. 여름철, 그 따가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때로는 시들고 말라죽기까지 한 잎새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을날, 살찐 열매가 탐스럽게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뭇잎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어찌 조그마한 열매라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자기의 할 일을 다한 잎새는 가을이 다하면 결국 빈손만 가지고 흙으로 돌아간다. 결코 열매를 시샘하거나 남아있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미련없이 제 한 몸을 떨군다. 스스로를 다 내어주고도 말 한마디 없이 떠날 때와 떠날 장소를 아는 잎새를 보면 나는 괜스리 부끄러워진다. 일찌기 젊은 나이에 일제 치하에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꽃처럼 꺾인 윤동주 시인은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끄러워했던가.    이제는 허욕의 무성했던 잎새들을 버리고 오만스러웠던 여름의 푸르름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 그것은 늦가을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총이기도 하다. 이제사 푸른 하늘을 가슴에 끌어들여 정말 겸손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계절이다. 나를 내려놓고 떠나버린 젊음의 기차는 아직도 기적 소리 요란히 남기고 사라졌지만, 그 기적 소리는 아직도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레일 위를 서성이며 놓친 기차를 아쉬워만 할 수는 없다.     이제 나를 위해 차비를 해야 할 차례이다. 이제까지 떠나보내는 아픔과 떠나야 하는 이별의 아픔 속에 머물러 지내면서 방황했다면 이제 감연히 내가 나로 돌아오는 이 계절을 나는 사랑한다. 이제껏 거짓된 자기로 살아왔던 잎새들의 나불댐이나 그 허황된 춤추기에서 벗어나서 참으로 나의 본연의 모습으로 남는 시각에 하늘은 내려와 내 품안에 안길 것이다. 그리고 이제라도 단아한 자기 모습을 보며 겸손히 엎드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해야겠다.     인생의 겨울은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칠 것이다. 개미 같은 곤충도  그 겨울을 위해 여름날 부지런히 일해 왔고, 벌들도 꿀을 따다 예축을 했고, 철새들은 남쪽으로 날아갔고, 그리고 맹수조차도 동면을 위해 여름날 충족히 양식을 예비했으니 우리는 우리의 겨울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예비할 것인가. 나는 아직도 여름이 내려놓은 낯선 역에서 미아처럼 어리둥절하고 철부지처럼 두려워 떨면서 서서히 추워지는 가을날의 나목처럼 그렇게 서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울지 않으련다. 늦가을에 늦둥이로 태어난 아이처럼 아직도 철들기 멀었지만, 나는 이 가을을 사랑하련다. 원망을 쌓지 말고 분노를 쌓지 말며 내려 쌓이는 눈처럼 포근한 사랑을 쌓자. 집착도 미련도 훌훌 벗어던지고 두둥실 떠가는 구름의 마음이 되자. 좋을 때도 궂은 날도 있게 마련이거니, 찼다가는 비울 줄 아는 달을 본받자.   떠나보낼 것 다 보내고 나서 느끼는 허전함보다는 이제사 누리는 참 평안의 행복을 피부를 스쳐가는 스산한 바람에도 나누어주며, 따뜻하게 실어 보내자. 내 마음 실려 떠나간 그 바람, 엄동설한 돌고 돌아 탕자처럼 다시 돌아오면, 새 봄엔 나의 가지에도 꽃이 피리라.     1시간이 조금 넘는 산책을 마치고 산책로 입구로 돌아왔다. 소슬바람에 얼마 남지 않은 나무 잎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대지에 나풀나풀 별빛처럼 내린다. 이제 나무들은 잎이 다 떨어지고 나무의 몸통이 드러나는 가을바람,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돌아올 봄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생명이 낮은 곳으로 내려 근원을 찾아 돌아가는 계절이다. 떠날 때를 알고 대지 위로 내려와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들의 순회가 자연스러워 숙연하다. 온몸과 마음에 계절이 사무친다. 물처럼 바람처럼 시처럼 살고 싶다. 그렇게 살다 가리라.     살며 생각하며 늦가을 단상 가을 나무 산책로 입구 온몸과 마음

2021-11-3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